주변에 노숙자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로 치부해 버린다.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 생각은 무척 다르지만 그 동기는 사실 비슷하다. 판단의 잣대는 어쨌든 도덕이다. 이와 관련해 자주 듣게 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어쩌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glesse Oblige)는 '고결한 의무', '상류층의 의무'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도덕과는 관련이 없는 개념이다. 차라리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배경은 신분제에 있다. 신분제는 과거에 동양이나 서양이나 별반 차이 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두 신분제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동양의 신분제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한 서열의 의미가 강한 반면, 서양의 신분제는 역할과 기능의 차이를 의미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적 배경
동서양의 신분제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동양의 병농일치 제도다. 중국은 평시에 농사를 짓던 농민이 전시에 병사로 복무했다. 고려와 조선의 군사제도도 기본적으로 병농일치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농민과 병사과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 농민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고, 병사는 별도로 국가 방위와 영토 확장에 복무했다. 병사의 수가 부족하면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서양에서의 농민과 병사의 구분은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은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맡는다는 의식으로 이어졌다. 이런 발상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연결되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은 기원전 2~3세기의 포에니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카르타고와의 전투에서 전쟁비용을 대부분 부담했고, 직접 전장에 나가 전사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도적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개념이다.
주변에서 흔히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그 원인이 도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가 부족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카이사르를 보면 그런 역사적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카이사르를 본래 군인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그는 그냥 좋은 집안 출신의 정치가였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전쟁 경험을 쌓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위험한 전쟁터만 골라 지휘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였고, 그런 식으로 황제의 자질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지배층에게 그런 의무를 요구하지 않았다. 역사를 보면 서양의 지배자들은 대개 군사 원정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동양의 지배자들은 몸소 전장에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서양의 지배자라고 위험한 전장에 나가고 싶었을 리는 없다. 그게 의무라는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그런 의무감이 없었다. 지배층은 자신의 자질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렇게 전쟁에서 나온 개념이었으나 평화 시에는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층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라는 것도 당시 이탈리아 북부 귀족들이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유럽의 예술이 대개 그렇다. 독일권에서 음악이 부흥한 것도 당시 귀족들이 음악가들에게 후원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원자이면서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다.
현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정리해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단순히 상류층이 사회적 하층민에게 베푸는 시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다. 상류층이 그 지위를 유지하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의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좀 더 현대적인 관점에서 정의하면 이렇다.
- 사회적 책임 : 단순히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것을 넘어, 사회에 기여하고 공동체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도덕적 의무 : 사회 지도층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도덕적인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봉사정신 :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봉사정신을 강조한다.
경영 측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이 개념 또한 서양에서 발생한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 단순히 이윤 추구를 넘어 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기업이 법적인 의무를 넘어 윤리적 책임을 다하며, 지역사회와의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대개 환경보호, 사회공헌, 윤리경영의 모습을 띤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단순한 경제 주체를 넘어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업과 사회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으며, 혹은 보여주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전통과 뿌리가 취약하다 보니 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도덕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의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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