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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의 성공신화, 레이 크록의 일대기 : 도전과 혁신의 패스트푸드 제왕

by 불꽃유랑단 2024. 4. 29.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세웠으며,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했다고 '에스콰이어'지에서 쓴 적이 있다.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를 오늘날의 세계적 프랜차이즈로 만든 사람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레이 크록의 책을 인생의 바이블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어떤 내용이길래 바이블로 언급하는 걸까? 레이 클록의 비즈니스 역정을 보자.


 

레이 크록(Ray Kroc)은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미국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52세에 사업을 시작해 맥도날드를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프랜차이즈를 하나의 산업으로 창조해 냈다. 그가 52세였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이다. 지금의 52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맥도날드는 코카콜라와 함께 하나의 문화로까지 자리 잡은 미국의 상징 같은 브랜드다. 작은 도시의 일개 레스토랑에 불과하던 맥도날드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배경에는 레이 크록의 놀라운 집념과 경영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경영 역정은 지금도 많은 경영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레이 크록의 일대기와 경영원칙은 그의 책 "Grinding It Out: The Making of McDonald's"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의 일대기를 따라가 보자.

 

초기 생애 : 좌절과 모험의 시작

레이 크록(1902년 10월 5일 ~ 1984년 1월 14일)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레이 크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사업재간이 있었고 공상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1920년대 초 종이컵 판매원으로 일하고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연주해 생계를 유지했다. 17년간 종이컵을 판매하는 동안 회사 내에서 세일즈 부문 최고 자리에 오른 그는 6개의 회전축으로 돌아가는 멀티 믹서를 보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 직감은 결과적으로 맞았다. 전국에서 구입 문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대부분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의 맥도날드 형제가 쓰는 것과 같은 믹서를 사고 싶다는 문의였다. 이를 계기로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로 향했다.

 

맥도날드와의 만남 : 운명적인 결별과 새로운 시작

1954년, 52세의 크록은 이렇게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에서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독특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을 발견한다. 15센트에 햄버거, 10센트에 감자튀김을 판매하는 합리적인 가격과 빠른 서비스 시스템에 크게 감명받은 그는 맥도날드 형제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게 된다. 이때 그는 오랜 세일즈맨 생활로 관절염과 당뇨를 앓았으며, 갑상선과 담낭 제거 수술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크록은 아직 자신의 전성기가 오지 않았고 계속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고 있었다. 

 

맥도날드의 프랜차이즈 권리를 획득했지만 처음부터 성공적인 사업은 아니었다. 낮은 프랜차이즈 권리료로 인해 본사 수입은 형편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각 지역 매장을 본사에서 소유하고 점주에게 임대하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식은 맥도날드 본사에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했다. 

 

이후에도 레이 크록은 점포 확장과 메뉴개발 등 혁신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맥도날드 형제와의 의견 차이와 갈등을 촉발한다. 맥도날드 형제는 크록의 비즈니스를 버거워했다. 결국 크록은 맥도날드 회사를 270만 달러에 인수하게 된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제국 건설 : 끊임없는 노력과 혁신

맥도날드의 새로운 사장이 된 크록은 전국적인 프랜차이즈 체인으로 확장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는 엄격한 품질 관리 시스템과 표준화된 운영 방식도입하여 맥도날드의 일관된 맛과 서비스를 전국 곳곳에 구축했다. 크록은 철저한 청결관리와 기본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QSC & V'를 종업원들에게 늘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것은 '품질, 서비스, 청결 그리고 가치'의 앞 글자를 딴 것이었다. 그의 경영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한, 나이를 잊은 정열적인 활동으로 부동산 개발, 해외 진출, 빅맥, 해피밀 등 혁신적인 메뉴 개발 등을 통해 맥도날드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제국으로 만들었다.

 

레이-클록이-설립한-햄버거-대학
시카고에 위치한 맥도날드의 햄버거 대학

 

논란과 비판 : 성공과 어두운 그림자

크록의 공격적인 경영 방식과 프랜차이즈 체인 운영 방식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대하는 사람들은 신봉자가 되거나 적이 된다고 할 정도였다. 사업 초기 맥도날드 형제와 불화로 갈라섰으며, 그의 심복이었던 해리 소노번과도 대립하여 결별하였다.

 

하지만 그의 비전과 리더십은 맥도날드를 세계 최대 규모의 패스트푸드 체인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기업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레이 크록은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으로 세계를 흔든 패스트푸드 제왕이다. 그는 성공과 논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 복잡한 인물이지만,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맥도날드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레이 크록의 유산

맥도날드를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하면서 레이 크록은 높은 품질을 유지하면서 규모를 확대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맥도날드의 역사는 품질 표준화와의 싸움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정도다. 프랜차이즈 사업 특성상 이는 핵심적인 문제였다. 크록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매장을 확대하면서도 품질을 균질하게 유지하는 법을 확립했다. '햄버거 대학'설립해서 그곳에서 교육받고 인증받은 사람만 매장을 열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상품개발연구소도 만들어 메뉴별 조리시간과 방식을 표준화했다. 

 

레이 크록에 대한 안 좋은 시선도 많다. 맥도날드를 키우는 동안 비정한 행동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정당당하지 못한 행동에는 명확한 선을 그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떤 직원이 경쟁사에 스파이를 보내는 방안을 제안하자, 그는 "그럴 바엔 차라리 나처럼 새벽 2시에 경쟁 상대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고기와 빵을 얼마나 쓰는지 조사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비겁한 짓은 싫어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상대와 싸웠다

 

또한, 레이 크록은 '고객에게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사람이다. 매장의 스태프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데, 이는 모두 고객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주문을 받는 직원의 웃는 얼굴이야말로 맥도날드의 이미지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맥도날드 성공의 관건 매장 스태프와 프랜차이즈 오너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맥도날드는 피플 비즈니스'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레이 크록의 성공 비결은 열정과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말을 동료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될 때가지 해야 돼. 이 세상에서 꾸준함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어. 재능이 있고 천재라도, 교육을 많이 받았어도 실패하는 사람은 많아. 전능한 것은 신념과 꾸준함뿐이야." 그의 좌우명도 이런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미숙한 동안에는 성장할 수 있다. 성숙한 순간 부패는 시작된다"

 

레이 크록의 일대기를 보면 비즈니스는 전쟁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엄청난 경영전략보다는 집념과 열정이 사업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성공의 키는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레이 크록의 최우선 비즈니스 모토는 단순함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단순하게 해, 이 바보야!(KISS: Keep It Simple, Stupid!)"였다. 레이 크록의 비즈니스 일대기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의 책 "Grinding It Out: The Making of McDonald's"을 읽어보기 바란다. 국내에는 "사업을 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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