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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왕 가설 : 진화생물학이 알려주는 경쟁에 대한 냉정한 진실

by 불꽃유랑단 202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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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진부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퇴보하게 되어 있다. 이는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개인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고 흥미롭게 묘사한 생물학적 개념이 있다. 바로 '붉은 여왕의 가설'이다.

 


 

불일신자 필일퇴(不日新者 必日退)

하루하루 거듭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하루하루 퇴보한다

- 근사록 -

 

 

'붉은 여왕 가설'의 배경

'붉은 여왕 가설'은 진화 경쟁에 대한 생물학적 가설로서, 생명체는 주변 환경과 경쟁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화해 적응하여야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며, 진화하는 생명체가 환경을 초월하여 일방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다는 이론이다. 이 가설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편인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동화에는 엘리스가 붉은 여왕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계속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엘리스는 숨을 헐떡이며 붉은 여왕에게 묻는다. "계속 뛰고 있는데, 왜 이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이렇게 달리면 벌써 멀리 갔을 텐데." 그러자 붉은 여왕이 답한다.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붉은 여왕이 사는 곳에서는 제자리에 멈춰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이동해 버리고, 그 자리에 멈춰있으려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기묘한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는 그 세계가 주변의 물체가 움직이면 주변의 세계도 같이 연동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며, 앞으로 나아가려면 죽어라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변 상황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진화하더라도 앞서 가지 못하고 간신히 제자리를 유지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붉은 여왕'과 진화의 법칙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밴 베일른(Leigh Van Valen)'은 "새로운 진화의 법칙"이라는 논문에서 '지속 소멸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붉은 여왕 가설'을 제시했다. 그 논문에 의하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가운에 적어도 90%, 많게는 99%가 소멸했다.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다른 생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화가 더딘 생명체는 결국 멸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마치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환경과 비슷하여 '붉은 여왕'이 하나의 가설로 차용된 것이다. 

 

동화-거울-나라의-엘리스에-나오는-붉은-여왕이-달리는-장면
동화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끊임없이 달리는 장면

 

이해를 돕기 위해 '붉은 여왕 가설'의 핵심 의의를 알아보려고 한다. 

  • 진화의 동력 : 붉은 여왕 가설은 생물의 진화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쟁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 공진화(Coevolution) : 붉은 여왕 가설은 종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공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 등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함께 진화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공진화를 간략히 정의하면 거대한 생태계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그룹 간에 상호 연관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공진화는 경쟁과 협동, 그리고 제한된 동일자원에 대한 서로 다른 활용이라는 피드백으로 발생한다. 
  • 적용의 범용성 : 붉은 여왕 가설은 생물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사회학, 경영학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 이 가설은 군비경쟁 현상을 설명하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한 국가가 신무기를 개발하더라도 다른 국가에서 방어무기를 개발하여 무력화하고, 이어 계속 더 좋은 무기를 개발하여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군비경쟁이 벌어진다. 

 

'붉은 여왕 가설'과 경영학

위에서 본 것처럼 붉은 여왕의 가설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진화와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기에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비유이기 때문에 실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중에서 조금 더 살펴보고 싶은 분야는 경영학이다. 붉은 여왕의 가설을 경영학에 처음 접목한 사람은 스탠퍼드대학 교수인 '윌리엄 P. 배넷(William P. Barnett)'이다. 그는 논문 "조직 진화 내의 붉은 여왕"에서 시장에서의 경쟁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처음 인용했다. 

 

배넷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하다. 시장에서의 경쟁이 시장 참여 기업을 모두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과를 내려는 기업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잠시 시장의 승자가 되지만 뒤이어 상대적으로 뒤처진 기업들이 분발하여 우월적 지위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새로운 경쟁기업은 어디에나 있다. 중단 없이 혁신하고 경쟁기업을 살피지 않는 기업은 결국 시장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 설명은 붉은 여왕 가설과 거의 일치한다.  

 

붉은 여왕 가설은 경영학의 혁신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혁신의 필요성을 설명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은 비유도 찾기 힘들 정도다. 기업에 발전이 없다면 그 자체가 퇴보다. 혁신적으로 뒤바뀌는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글로벌 기업이 순식간에 시장 주도권을 타 기업에 내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대표적으로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 시장에서 모토로라 및 소니 등이 기존의 압도적 시장점유율을 상실하고 몰락하거나, 넷플릿스, 우버, 테슬라 등 각 사업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 사례, 국내 사례로는 쿠팡의 온라인 시장 독점 등 각 분야에서 수많은 사례가 있다. 시장의 속성 자체가 곧 경쟁이기도 하고, 자본과 생산수단을 가진 측이 자신이 벌어들이는 이윤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신제품을 연구해야 한다.     

 

붉은 여왕 가설은 배넷이 말한 것처럼 기업이 시장에서 우위를 점유하더라도 그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도 시사한다. 왜냐하면 경쟁자 역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시장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새로운 기술과 시장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경영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붉은 여왕 가설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기업 생존의 필수 조건임을 말해 준다. 기업은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혁신을 통해 경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경쟁우위라고 해도 사실은 그저 현상유지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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